내가 집에 가서 자라고 했죠: 공작소 (2024)

따사로운 햇살이 몸을 감쌌다. 연우는 여유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던 터였다. 일찍 일찍 다닌 보람이 있네, 이렇게 푹 자도 시간도 남고. 아, 지금 사건 진행이 말이 아닌데. 선배는 이미 와 계시려나?

며칠 전 집 앞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이후 몇 번 밥을 챙겨주었더니 그새 반가워하는 모양새로 제 새끼를 물어다 보여주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아침이었다. 연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 앞 우연슈퍼를 들러 박카스 두 병을 사 들고 제 패딩 양쪽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선배님 요새 밤도 많이 새고 그러니까, 몇 개 갖다 놓긴 해야지. 상자째로 갖다 놓으면 그거 믿고 밤새우니까 딱 두 개만. 오케이, 아주 좋아.

"좋은 아침입니다~"

밝은 목소리로 사무실의 문을 열어젖힌 연우가 아무 목소리도 돌아오지 않는 사무실에 머쓱하게 웃음을 지었다. 익숙한 먼지 냄새가 연우의 코끝을 스쳤다. 탁, 하고 조용히 문을 닫은 연우가 주머니에 넣어둔 박카스 두 개를 구석에 잘 세워두고 주변을 살폈다. 국 팀장님은 아직이시고... 우주도... 선배님은, 아.

의자에 기대어 잠든 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큰 덩치를 구길 대로 구기곤 제대로 덮을 것 하나 없이 정장 마이를 대충 덮고 잠든 하영을 보고 있자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기서 자지 말라니까. 진짜 사람 걱정되게. 걱정하는 사람 입장은 생각 안 하지 또? 잠은 집에 가서 자라고, 안 되면 우리 집에서라도 눈 붙이고 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괜히 우리 집 열쇠까지 쥐여준 줄 아나. 또 사건만 중요하고 자기 몸이고 여자친구고 눈에 뵈는 게 없어 진짜.

그래, 몇 번은 너무 피곤하면 그럴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다니까. 오히려 피곤한데 밤에 운전하면 더 위험할 수도 있고... 아니다. 됐다, 됐어. 내가 이렇게 혼자 납득해봤자 뭐 하냐고, 의자에 기대어 잠든 하영을 확인한 연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터운 서류 더미가 흐트러진 데다, 대체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는지 한구석에 버려진 커피믹스 쓰레기와 구겨진 종이들이 수북했다.

연우가 서류를 뒤적여 몇 장을 들춰보곤 서류와 하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빈집을 노리고 강제로 문고리를 훼손해 침입, 여성이 집에 들어온 후 숨어있다 나타나 목을 조르고 기절시킨 후 살인. 따로 사라진 귀중품은 없으며 이후 두 곳에서 동일한 사건이 발생함.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12세 여아가 성추행을 당한 뒤 살해당한 사건과 동일범임을 염두에 두고. 서초구 강간살인 사건... 이거 때문이었구나. 고민할 거면 차라리 집에서 푹 쉬고 와서 고민하지. 이게 뭐야, 이게. 누워서 자는 것도 아니고, 이불을 덮는 것도 아니고. 의자에 쪼그려서 자기 옷 하나 덮고. 속상하게 진짜.

연우는 하영의 많은 순간을 지켜봐 온 사람이 아니었던가. 강력반 시절 웬 범죄자를 만나봐야겠다며 영치금까지 넣어주던 하영, '그 화' 해보겠다며 흉기를 들고 어두운 밤길을 서성거렸을 때의 하영, 교통사고로 정신을 잃고 일을 그만두겠다며 지친 얼굴을 하던 하영,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던 하영, 건조하면서도 수줍게 고백해오던 하영까지. 연우는 그 숱한 날들과 하영을 알았고, 그랬기에 하영에게 이 일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연우가 익숙한 손길로 빠르게 하영의 책상을 갈무리하곤 허리를 숙여 하영을 살살 흔들었다.

"...선배님, 일어나셔야 해요."

으응...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잔뜩 잠긴 목소리에 연우는 안쓰러운 마음을 꾹 누르고 대꾸했다. 일찍이요? 저 오늘 평소보다 늦게 왔는데. 저 온 줄도 몰랐으면서 일찍이에요 지금이? 속상한 마음에 톡 쏘아붙인 연우가 잠이 덜 깬 하영의 눈앞에 제 손목시계를 들이밀었다. 그제야 시계를 확인하고 창문 안으로 밝게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알아차린 하영이 급히 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영이 연우의 눈치를 살피며 반사적으로 말하기 무섭게 연우의 대답이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들어왔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어제도 사무실에서 주무셨어요? 내가 하지 말라고 했죠. 나 진짜 싫어요. 단호한 연우의 대답에 하영의 말문이 일순간 막혔다. 잠깐의 적막 끝에 연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저랑 약속하셨으면서."

"내가 집에 가서 자라고 했죠."

평소의 연우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 하영이 급히 무어라 변명했다. 아, 아니 연우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진짜 잠깐 숨만 돌리려던 게... 정말 들어가서 자려고 했어. 나 엊그제엔 들어가서 잤잖... 아. 덜 깬 잠이 하영의 목을 막았다. 저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며 변명하는 하영을 흘끗 보곤 제자리로 돌아간 연우는 길게 숨을 내뱉은 뒤 툭 가방을 내려놓았다. 하영이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려 우물쭈물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른 아침, 사무실 안은 무거운 적막으로 가득했다.

"좋은 아침!"

콧노래를 부르며 문을 발칵 열고 들어온 영수가 멈칫 서 둘의 눈치를 살폈다. 서류에만 눈길을 주고는 딱딱하게 앉아 있는 연우와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피는 하영.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친 영수가 다시 밝은 목소리를 되찾고는 다리로 문을 뻥 차서 닫으며 말했다. 뭐야 너희. 싸웠어? 또 왜~

능글맞은 목소리에 연우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꾸했다. 약속도 안 지키고. 미워죽겠네요. 높낮이 없이 짓씹어 내뱉은 말에 영수가 흠칫했다. 빠르게 하영과 눈빛 교환을 마친 영수가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웃음기를 잃지 않고 짐짓 엄하게 소리쳤다. 아이, 하영이 너 또 여기서 쪼그려 잤어?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야 인마, 나한테 죄송할 일이 아이지. 저어기, 그. 연우한테 빌어라 내는 몰라.

"좋은 아침입니다!"

영수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힘차게 문을 열어젖힌 우주가 조금 전의 영수와 같이 멈칫 하고 섰다.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문을 닫고 제 가방을 고쳐잡고 자리로 달려간 우주가 입 모양으로 소곤대며 영수에게 물었다. 분위기 왜 이래요? 몰라. 어우 찬바람이 쌩쌩 불어.

"자 자, 사랑싸움은 나중에 천천히 하시고."

사건 정리나 해보자. 범인 잡아야지. 영수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하영이 서류 몇 장을 정리하더니 칠판에 사진을 몇 장 더했다. 흉기로 추정되는 것은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칼로 추정됩니다. 여러 차례 베듯이 찔렀고, 공부 꽤 많이 한 놈이에요. 정확하게 급소를 찌르기보다는 출혈이 많은 신체 말단부터 시작해서 남의 고통을 즐기는 놈인 것 같습니다.

피해자들 간의 공통점은 여성이라는 점 말고는 딱히 공통적인 부분이 없어요. 범행 장소가 서초구일 뿐이지, 피해자의 거주지는 넓게 퍼져 있습니다. 충북 진천에 거주하던 여성도 있으니까요. 납치를 해서 본인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끌고 가 천천히 살인을 즐겼겠죠. 너무 잔인한 수법 때문에 원한 관계가 아닐까 했는데...

다만, 일반적으로 정말 살인이 목적이었다면 가족도 없고 연줄도 없는 사람들을 노렸겠죠. 어제 유가족들을 만나봤습니다. 다들 가족들과 사이도 좋았고, 혼자 살더라도 거의 매일 연락하는 사이였고요. 무조건 살인과 거기서 오는 쾌감만이 목적이 아닐 겁니다. 내면에 억눌린 게 있거나, 열등감이 있을 수도 있고요. 이미 여러 번 표출한 적이 있을 겁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닐 거예요. 다만, 격리된 공간에 있으면서 억눌렸던 욕구가 이번에 터진 것일 수 있죠.

"전과가 있을 거란 소리야?"

네. 작게나마 표출했을 거예요. 어떤 방법으로라도요. 그러니까, 방화, 살인. 이런 강력범죄가 아니더라도 분명 누군가는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단순한 절도, 사기 같은 것일 수도 있죠. 원래 하던 놈이에요. 그랬기 때문에 범행 계획이 사전에 계획되었을 겁니다. 최대한 자신을 숨기려고 하겠죠. 이렇게까지 한꺼번에 표출되었다는 건 무언가 억눌렸다는 뜻인데. 그게 교도소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지옥 같은 곳에 다시 돌아가기 싫으니까요. 타깃을 정해 두고, 계속 관찰하면서 범행 시간대와 수법을 그때그때 맞춰서 진행했을 겁니다. 체계형에 속하는 거죠. 피해자를 물색하고 납치 후 도구로 결박한 채 강간한 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체계적인 행동도 보이고요. 우발적이지 않아요. 12세 여아의 경우에는 추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범인에 관련해서는 나온 게 없어요. 굉장히 조심스러운 유형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주변을 계속 맴돌았을 겁니다."

"피해자 집 주변에는 CCTV가 없어서 주변 도로 카메라를 전부 뒤졌는데요."

공통으로 보이는 차량이 몇 대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대포차인데, 이 대포차가 전에 걸렸던 기록이 있어요. 이연옥이라는 여자가 만든 대포차인데, 이 여자 조금 특이합니다. 이 여자가 결혼을 세 번 했는데, 다 죽었어요. 처음 한 번은 교통사고인데, 나머지 두 번은 다 화재입니다. 화재 발생 장소도 겹쳐요. 보험 사기 의심됩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마지막에 사실혼 관계였던 남자가 있어요. 김태강이라고, 어쩌면 협업 관계로 보입니다. 이외에 더 있을지는 더 알아봐야 하고요.

"마찬가지로 전과 있고?"

네. 김태강, 36세. 15년 전에 강도살인 전과가 있고, 출소하자마자 사기로 다시 들어가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지금 새로운 피해자 물색하고 있을 겁니다. 스토킹 신고 들어온 거 없는지 알아봐 주세요.

자 자! 일합시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자! 영수의 외침을 끝으로 분석팀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영만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칠판을 노려보았다. 연우의 걱정 섞인 눈빛을 뒤로 하고, 하영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 차주가 정말 범인이라면, 왜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고 철저한 범죄에서 이런 알기 쉬운 단서를 내놓았을까.

***

갑작스레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사무실에 쨍하니 울렸다. 네, 네네. 아... 네. 알겠습니다. 조용한 사무실 내 우주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잠깐의 적막 끝에 달칵,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지나갔다. 가라앉은 우주의 목소리가 영수를 불렀다.

"팀장님."

"오야."

"서초구 사건인데요... 김태강 지금 막 잡혔다는 것 같습니다."

뭐? 하영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전 계획 있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주변 도로 카메라 싹 뒤져서 공통으로 찍힌 차량 추리고, 전과자 따로 추렸는데, 차량 소유주 조사했더니 하나가 서초구 토박이더라구요. 그래서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스토킹으로 들어왔대요. 아마 다음 희생자 물색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태강 맞지? 네. 지문 대조까지 했다고 합니다.

"광역수사본부?"

"예."

"범행 인정한대?"

네. 잡히자마자 술술 불었다고 하더라고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 자기 혼자 한 거라고 하네요. 그 차주는 관계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전부 본인 단독 범행이라고 진술했답니다. 우선 가보시죠. 급히 다리를 움직이는 하영에게 따라붙으며 설명하는 우주의 설명을 들을 수록 하영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

오늘 날씨가 어떤 것 같아. 뭐, 좋네요, 이렇게 끌려와도 햇빛이 다 들어오고. 기분이 어때. 다를 게 있나요. 솔직히, 좀 좋은 편이에요. 왜? 왜긴요. 이렇게 유명 인사도 보고. 방송도 여러 번 나오시고, 신문에도 여러 번 나오시고. 내가 살면서 이런 사람 볼 일이 얼마나 있겠어요.

실실 웃으며 대꾸하는 그의 모습에 하영이 인상을 팍 구겼다. 그는 이제 그들에게 푹 담가질 필요도, 생각도 없었지만, 어쩐지 하영은 그에게 저도 모르게 위험함을 감지했다. 이 새끼는 뭔가 의도가 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 하영이 제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탁자에 탁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제 앞에 앉은 이 남자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내내 웃는 낯이었다. 하영이 말을 이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됐네? 수갑에 묶인 두 손을 꼼지락거리던 김태강이 대충 대답했다. 네, 뭐.

"그 여자들은 왜 죽였어."

"나를 개무시하잖아요."

"무시를 한다?"

"네. 아주 벌레 보듯이 할 때도 있고... 내가 죽인 그년들만 날 무시하는 줄 알아요?"

그러면 또 다른 사람들도 너를 무시한다는 뜻이야? 네, 그렇죠. 경찰 아저씨는 모르나 봐요? 하긴, 이렇게 누가 봐도 번듯한 사람이니까 그렇겠죠... 그래서, 너를 무시한 사람들을 죽였다? 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요. 그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그게 가능하다면요. 근데 안 되잖아.

"내가 고작 몇 명 죽였다고 여기 와 있잖아요. 근데 그게 가능하겠어?"

그러면 왜 하필 그 사람들이었던 건데? 그냥, 꽂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이 년을 죽여야 남들한테 더 절망적일 수 있겠다 싶은 거요.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영은 책상 밑에 둔 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절망,"

아 뭐 있잖아요, 화목한 가정에 태어나서 평생 사랑받고 인정받고 자랐는데, 그게 다 자기 덕이라고 생각하는 새끼들. 아주 오만한 새끼들. 그런 새끼들은 하나만 죽여도 효율이 좋다니까요? 아, 어린 애일수록 더 좋아요. 다 큰 여자야 뭐 바로 뭔 일 났구나 싶지만, 어린 애면 혹시라도 자기들이 잘못해서 애 잃어버렸다 몇 날 며칠을 찾으러 돌아다니더라니까요? 심지어 애들은 말도 잘 들어. 얼마나 좋아요?

그는 죄책감 없이 태어난 사람 같았다. 하영이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사람과 저와의 거리를 가늠하다 픽 웃음을 흘렸다. 이질감이라기보다는, 그에겐 마지막 여유였다. 그 모습에 김태강이 제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가 뒤로 기대었던 자세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웃겨?"

내가 왜 미안해? 그런 새끼들은, 다 업보 받은 거예요. 누릴 거 다 누리고, 그거 하나 못 가진 사람을 얼마나 개무시하는지 아저씨가 아냐고요. 김태강이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외쳤다.

내가 그걸 알아야 해? 하영이 차갑게 대꾸했다. 김태강은 하영은 몇 초간 노려보다 이내 순식간에 표정을 풀고 다시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뭐, 알아달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아냐고 묻는 거죠. 눈앞의 남자는 다시 피식피식 웃음을 흘려대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는 했어요 내 복수를. 어때요? 아저씨는 내가 여기 있는 게 당신네 끝없는 수사? 노력? 아무튼, 그거. 그거 덕택인 줄 알죠?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나는 너에 대해 궁금해서 여기 앉아있는 게 아니야. 너는 그냥 찌질한 사회 부적응자일 뿐이니까. 너는 여기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지금까지는 네가 그 누굴 죽여도 아무도 몰랐겠지만, 이제는 아니거든. 여기 있는 이상, 너는 그냥 여느 범죄자와 똑같은 쓰레기 새끼라고. 알아들어?

하영의 말을 듣고 잠시간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김태강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하하, 아니. 미안해요. 나도 좀 웃음을 참아보려 했는데. 아, 너무 웃겨. 그는 눈물까지 닦으며 박장대소했다. 하영이 가만히 앉아 그를 응시하자 그제야 갈무리한 김태강이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 듯한데.

"아니야. 나 여기 내 발로 온 거거든."

"뭐?"

"뭘 물어보고 그래요, 다 알게 될 텐데."

하영이 서류철을 들어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서류철 내에 묶여 있던 자료들이 흩뿌려지며 현장을 찍은 적나라한 사진들이 책상 위로 널브러졌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웃음소리였다. 희열에 찬 웃음이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손에 든 김태강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짤랑거리는 수갑 소리가 오히려 그를 흥분시키는 듯했다.

"봐봐. 다 이렇게 됐다고."

아저씨도 있죠? 소중해서 미치겠는 사람. 나는 이래서 사람이라는 게 정말 신기해. 하나만 어떻게 해봐도... 줄줄이 초상이라니까? 그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죠? 당신같이 바른 대로 살면서 대우받은 사람은 모르지. 그래서 그쪽은 평생 내가 어떤 지옥을 사는지, 그리고 가끔 만나는 그 천국이 얼마나 황홀한지 모르는 거야.

"닥쳐."

"더 이상 내가 궁금하지 않다고 했죠."

날 궁금해해 달란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 누가 궁금해해달래?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거든요. 아저씨. 만약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집 지붕이 내려앉았어. 그러면 구름을 원망하나? 구름을 궁금해해? 아니잖아. 그냥 받아들여요. 그게 어렵나? 그쪽 같은 사람들 싹 다 내가 죽여버릴 거라고. 그냥. 알겠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마지막 딱 하나만 다 끝나면,"

우린 다시 만날 거니까? 하영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김태강은 이제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더 이상 하영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을 지켜보는 새카만 창 너머를 바라보는 김태강의 눈빛은 어째서인지 누군가를 향한 것만 같았다.

하영은 아주 오랜만에 기분이 나빠졌다.

***

한편, 광역수사대 본주, CCTV 영상 자료실. 연우는 증거 자료 확보를 위해 하영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조금 전 면담 들어갔단 소식은 들었는데.

연우는 가끔, 아니 자주 상념에 빠지고는 했다. 제 진심 어린 걱정이, 그리고 실망이 하영에게 늘 짐이 될까 봐. 그는 저 말고도 세상에 진 짐이 너무도 많은 사람이 아닌가. 연우는 늘 그것에 마음이 쓰였다. 하영은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 심력을 다 쏟아부을 수 없는 사람이고, 그녀를 향한 마음의 종류가 다를지언정 하영 자체가 그녀에게는 너무도 귀한 사람이라.

때문에 더욱이 그녀는 하영이 조금이라도 편안하길 바랐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에게 늘 헌신적이고 싶었고, 세상을 어깨에 진 그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 싶었다. 지금의 그가 홀로 무언갈 감당하려 들지는 않지만, 오랜 습관은 떠나지 않는 법이라. 하영은 언젠가 제가 궁지에 몰릴 때 모두를 뒤로 하고 홀로 고생하는 순간이 더 많았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봐온 연우 아니었는가. 연우는 하영이 어쩌면, 아픈 손가락이었을지도 모른다. 동료로서, 연인으로서. 하영은 정 많은 연우에게 늘 아팠다. 사랑했고, 아껴서 늘 아팠다. 그것이 연우가 하영을 사랑하는 수많은 방식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연우는 하영이 속상했다.

연우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그를 모르는 것이 아닌데, 뒤늦게 자신이 심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아무리 속상해도.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면서까지 사람 하나라도 더 살려보겠다 노력하던 하영인데. 심지어 결국 용의자까지 추려낸, 유능한 대한민국의 경찰인데.

"땅 꺼지겄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믹스커피를 양손에 들고 온 김 계장이 연우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커피를 받아 든 연우가 두 손으로 커피를 감싸 온기를 느꼈다. 뜨겁지도 않은지 호로록 다 넘겨버린 김 계장이 연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왜, 애인이랑 싸웠어?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면 척이제- 왜, 하영이가 또 속상하게 해서 그랴?"

"뭐... 그것도 있고."

연우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번 사건의 내용과 하영의 이야기, 그리고 저의 이야기. 김 계장은 한참을 조용히 연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기 좋은 낭랑한 목소리가 여러 개의 모니터 화면으로 가득 찬 공간을 배회했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예요."

"긍게, 연우 네가 속이 깊어서 그려."

"정말 그럴까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제가 너무 어리게 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바쁜 사람 괜히 짐 하나 더 준 거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하영이가 잘못했네! 뭐 그걸 그리 신경을 쓰고 그런당가. 연우 네가 속이 깊응게 그런 생각까지 하는 겨. 있냐, 하영이가 그려. 하나 꽂히면 지는 하나도 안 돌보고 매달리고. 지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는디 괜히 그거 보는 주변 사람들만 안절부절 생 난리가 난당께. 원래서부터 성격이 그려. 하영이 고것도 나름 나아진다고 나아진 건데, 그게 손바닥 뒤집듯이 확확 바뀌것냐. 연우 네가 많이 혼내고 어르고 달래야지 뭐. 그래도 네 말은 새겨들을라고는 하드마.

너도 그렇고, 하영이 갸도 그렇고. 고생이 많다. 우리 마누라가 딱 이십 년 전에 내헌티 똑같은 말을 혔었지. 그래도 다 내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거 아니께 또 흘려들을 수가 없는겨. 이거 짐이라고 듣기 싫어하는 놈허고는 만나지를 말어. 연우 네가 아까운게. 그래도, 하영이 갸는 그럴 아는 아녀. 긍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자녀. 아나, 여기 CCTV 니 싹- 긁어가라 그냥이.

연우가 작게 웃었다. 투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은 김 계장이 다 마신 믹스커피 종이컵을 챙겨 나갔다. 연우는 제 손에 든 빈 종이컵을 한참 만지작댔다. 조금은 확신이 생긴 듯했다. 연우가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려던 그때였다.

"추적해!!"

소란스러운 바깥 분위기에 연우는 급히 달려 나갔다.

***

김태강은 하영이 떠난 문에게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제 눈앞의 조사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하영이 자리를 뜬 후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그의 시선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어색하고 강박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했다. 그러다 갑작스레 얼굴을 구기며 정색하는 모습은 마치 어딘가 미쳐버린 사람과도 같았다.

"야, 이 새끼야. 이제 슬슬 말을 하자. 응?"

아까까지는 술술 불더니만 무슨 바람이 불어서 또 이 지랄이야. 야, 야! 그의 앞에 앉아 한참을 혼자 떠들던 조사관이 서류철을 책상에 쾅 던졌다. 그제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것은 정말 비유하자면, 얼음이 녹는 듯한 빠르기였다. 그는 몇 시간 만에 제대로 된 문장을 입 밖으로 내었다.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요."

조사관이 한숨을 푹 쉬며 훠이 손짓했다. 손짓을 확인한 형사 두엇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양 팔을 붙잡았다. 김태강은 어깨를 잡아 오는 손길을 뿌리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 내가 내 입으로 다 말했잖아요. 뭐, 나 덕분에 다들 승진할 거 아니야? 놔, 놓으라고. 이거 내 인권이에요.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거울 속에는 김태강의 정수리와 두 형사의 시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무엇을 그리 씻어낼 것이 많은지. 그는 꽤 오랜 시간 손을 헹궈내었다. 그것이 과연 손일지, 시간일지. 그것도 아니라면 죄일지, 거울 속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러던 그때, 김태강이 손을 씻는 행동을 잠시 멈추더니 강한 힘으로 세면대에 수갑을 내리꽂았다.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그는 달려드는 두 형사를 몸으로 막아내고 대걸레를 뽑아 들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전율했고, 미세한 떨림이 저를 증명하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는 틈을 노려 잽싸게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렸다. 창문 밖으로 던져진 빛이 그의 얼굴을 간신히 비추었다. 순식간에 시끄러워진 서를 뒤로 하고, 그는 길게 뻗은 그림자를 들고 어둠을 향해 서둘러 떠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빠르고 의도적이었으며, 그는 목적지가 있는 듯 전속력으로 달렸다.

"저 새끼 잡아!!"

암흑 속에 먹혀 사라지는 그의 그림자 뒤로 화려한 경광등 불빛이 급히 섞이기 시작했다. 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달려 나가는 몇몇이 있었고, 개중에는 연우도 있었다. 달려 나가는 연우의 뒤로 소리를 질러대는 이도 몇 있었다. 저 새끼 잡아! 하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김태강!!!"

그녀의 뒤통수를 때리는 이름 석 자에 연우가 속력을 올렸다. 거리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았고, 연우는 가쁜 숨을 갈무리할 새 없이 계속해 달렸다. 조금 전부터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는 도통 가까워져 오질 않았다. 연우는 직감했다. 이 자를 놓친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잡지 못하면 놓친다.'

얼마나 달렸을까. 연우의 목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수분이 부족한 기도가 타오르는 감각에 연우는 침을 삼킬 수조차 없었다. 눈앞의 이는 힘들지도 않다는 듯이 계속해 달렸고, 연우는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녀를 멈출 수 없게 하는 것은 경찰로서의 사명감일지도, 혹은 의무감일지도 몰랐다.

"여기!"

가로등 하나 없는 새카만 암흑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도로에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고, 그 고요함이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듯했다. 남자와 연우의 숨소리만이 고요히 섞이던 공간에 큰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곳에서 암흑을 가르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노랗게 보였다.

김태강은 소리가 난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렸다. 연우가 그를 쫓았다. 그는 민첩하게 차에 올랐다. 미리 이야기가 된 조력자인지, 그가 자리를 잡자마자 엔진 소리를 내며 차가 출발했다. 운전석에 앉아 창문으로 팔을 내민 이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그의 얼굴을 가렸다. 어두운 길을 빠르게 달리는 중, 그들 연우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연우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

차가운 바람이 그를 감쌌다. 김태강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살겠냐? 툭 던지듯이 물은 여자의 물음에 김태강이 답했다. 씨발, 그럼 당연하지. 거기서 평생 살으리? 그의 대답에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너 같은 개새끼들은 거기서 평생 사는 게 맞다고. 여자의 말을 농담으로 받은 김태강이 픽 웃었다. 미친년. 너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적막한 골목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새카만 암흑 속을 가로질러 비추었다. 빛이 직진하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의 암흑이었다. 암흑은 차가운 밤의 장소를 덮고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빛이 암흑을 헤치자, 그들의 앞에 있는 건물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오래된 패널로 둘러싸인 거대한 창고였다. 창고의 큰 문은 오래된 녹에 시달려 열려 있었다. 자갈과 흙이 흐트러지는 소리가 나며 그들이 차에서 내렸다.

김태강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뒷좌석에 던지듯 구겨 넣은 연우를 둘러멨다. 김태강이 비릿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운이 좋았다니까. 하필 따라온 년이 이 여자였을 줄이야. 김태강은 들떠 있었다. 지금, 그는 마치 제가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인 듯싶었다. 그는 창고 한구석에 그녀를 대충 던지곤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자에게 말했다.

"이 여자야."

"아, 그 여자?"

어. 예쁘장한 게 더 기분 나쁜 년. 여자는 어딘가에서 케이블 타이를 꺼내와 연우의 팔다리를 끈으로 묶기 시작했다. 김태강은 잠든 연우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야. 연옥아. 송하영이가 이 년을 그렇게 끔찍하게 아낀다더라. 김태강의 말에 이연옥이 눈썹을 치켜들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의미의 표정이었다. 김태강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대꾸했다. 에이, 씨발련.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이 년만 어떻게 해보면 되겠다니까. 너는 참 재미도 없는 년이야.

그래서, 마음에 들어? 이 여자가 네 마지막이라며. 여자가 따분한 듯이 대꾸했다. 손발을 전부 묶은 여자가 턱짓하자 김태강이 연우의 덜미를 잡아 창고로 질질 끌고 가며 말했다. 운이 좋았다니까. 어떻게 빼와야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날 따라와 주기까지 하고. 그의 말에 이연옥이 피식 웃었다. 오히려 쉽다니까. 제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다루기 쉽지.

김태강이 기둥에 연우의 팔을 다시 한번 고정해 묶었다. 야, 야. 준비해. 이연옥에게 대충 손짓한 김태강이 연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등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은 김태강이 갑작스레 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하하하! 하는 소리가 거대한 창고 안에 울렸다. 메아리같이 울리는 웃음소리가 이질적이었다.

어휴, 저 미친 새끼. 어두운 창고 안에서 불빛이 간헐적으로 비쳤다. 이연옥은 피곤한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저으며 거대한 상자를 발로 밀었다. 상자는 툭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고, 김태강은 희번뜩한 눈빛으로 상자를 뒤져 파이프를 꺼내 들었다. 스르륵-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퍼졌다.

김태강은 파이프를 손에 쥐고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심장은 흥분으로 뛰고 있었고, 동시에 차갑게 식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차가운 불, 혹은 뜨거운 얼음과도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지금부터 그의 판단이 곧 현실이 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할 것이었다. 이제 그는 이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듯했다. 반쯤 미쳐 있는 김태강을 뒤로 하고 이연옥은 어딘가에서 휘발유 상자를 질질 끌고 나타냈다.

휘발유 상자는 그녀의 힘으로 끌려오며 땅을 더럽히는 잔해를 남겼다. 그녀는 대충 바닥 이곳저곳에 휘발유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김태강과 연우를 중심으로 코를 찔러오는 휘발유 냄새가 어지럽게 날렸다. 휘발유 한 통을 다 들이부은 이연옥이 여전히 연우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김태강에게 짜증스레 소리쳤다.

"이 정도 도와줬으면 됐지?"

김태강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뚫어져라 연우의 감긴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억눌린 웃음이 이따금 피식피식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연옥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제 땀을 훔쳤다. 야, 야!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눈길도 주지 않는 김태강에 이연옥이 얼굴을 팍 구겼다. 야, 나 간다? 하기도 해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태도는 같았다.

김태강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연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어떤 사냥꾼이 자신의 먹잇감을 기다리는 듯한 집중력을 띠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차가운 금속 표면을 쓸어 올리며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김태강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이연옥은 팔짱을 끼고 인상을 구기며 지켜보다 한구석에 놓인 드럼통 위에 던져둔 차 열쇠를 팍 소리 나게 집어 들곤 창고를 나갔다. 끼리릭- 탕! 하는 녹슨 철제 문이 닫히는 기분 나쁜 소리만이 넓은 공간을 울렸다. 김태강의 존재는 마치 그 공간에 묵직하게 퍼져 나가듯 느껴졌다, 그의 존재는 마치 암흑 속에서도 주목받는 존재였다. 세상에 단 하나의 어둠이 있다면, 그 속의 유일한 존재는 김태강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마치 어둠에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세상의 그림자에서 태어나 그림자로 살다, 그대로 사라져버릴 사람.

김태강이 파이프를 들어 연우의 머리를 세게 강타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연우의 머리가 흔들렸다.

***

연우가 사라진 지 사십 분. 연우의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하영이 제 손을 비비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영수와 우주가 분주하게 전화를 돌리고 있었지만, 광역수사대 또한 그들의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영이 마른세수를 했다.

하영이 숨을 가쁘게 내뱉었다. 영수가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하다 그런 하영의 모습을 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하영아, 하영아 진정해라. 연우 괜찮을기다. 토닥이는 손길조차 마음이 조급하긴 마찬가지였다.

다투는 일이 있더라도, 연우는 연락을 받지 않고 잠적을 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영이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제대로 난 듯했다. 하영이 여전히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우가... 연우가 사라졌잖아요."

"...하영아."

"나는... 나는,"

저는 어떡해야 해요? 뒷말이 삼켜졌다. 이 순간, 하영은 그 누구보다도 절박했다. 동시에, 하영은 자신에게 실망했다. 지금까지 유가족을 이해하고 공감하겠다던 자신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 이 감정일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영이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다. 영수가 그런 하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영의 떨림이 고스란히 영수에게로 전해졌다. 영수가 숨을 고르곤 단호하게 말했다.

하영아. 니 경찰 아이가. 연우 찾아야제. 니가 이라고 있는 거 연우가 보면 좋아하겠다. 고개를 들어 영수와 눈을 마주한 하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해. 생각하자. 광수대는 여전히 추적 중이고, 난항을 겪는 이유는 중간에 끊긴 CCTV 때문. 도보로 이동한다면 멀리 못 갔을 것이지만, 주변 수색은 이미 마친 후. 삼사십 분 이내로 뛰어갈 수 있는 거리는 이미 샅샅이 뒤진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차량. 조력자가 있을 가능성과 도난 차량을 탑승했을 가능성. 조력자... 조력자. 하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김태강에게 조력자가 있었나? 놓친 것이 있나?

...이연옥. 이연옥이 있었지. 대포 차량을 가지고 있었던. 그렇다면 이연옥일까? 이연옥이라면, 어디서, 어떻게? 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철두철미하고 세밀하게 계획을 짜고 움직이는 김태강, 그리고 그를 돕는 이연옥. 김태강이 도망치며 사라진 서연우, 그리고 그의 도주 중 끊긴 CCTV 영상. 그렇다면 사전에 이미 계획을 세워 두었으며, 그는 남의 절망을 즐기겠다는 놈이었고...

"아니야. 나 여기 내 발로 온 거거든."

"뭘 물어보고 그래요, 다 알게 될 텐데."

...연우였구나. 연우, 연우였구나.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마지막 딱 하나만 다 끝나면, 우린 다시 만날 거니까?"

하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평소의 범행 패턴과 다를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감각에 사로잡힌 놈이니, 어쩌면 이것이 제 피날레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영이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 살인을 기쁘게, 그리고 충분히 즐기기 위해. 남들에게 자신의 위상을 보여준다기보다, 자신의 만족에 심취한 유형이니까. 근교에 CCTV가 없는 한적한 공간이면서 밤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 거주지가 아니면서, 그가 광적인 집착을 보일 수 있을 만한 곳. 김태강의 조력자 또한 아는 곳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곳.

하영의 머릿속에 수백 장의 서류가 휘리릭 지나갔다. 그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자꾸만 떠오르는 연우의 비극적인 모습을 애써 밀어내며 하영은 온 신경을 제 기억에 쏟아부었다.

김태강에게 감춰진 과거가 있었나? 과거, 과거... 그가 결국 돌아갈 만한 곳. 그게 어디인가? 자신의 내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만약 하영 자신이 그였다면...

...아.

하영이 눈을 떴다. 하영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으려 가만히 서 있던 영수와 우주가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두 시선을 느낀 하영이 급하게 차 열쇠를 집어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영수와 우주가 따라 달렸다.

연우가 위험하다.

그것도 많이.

***

연우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코를 찔러오는 휘발유 냄새에 두통을 느낀 연우가 습관적으로 손으로 머리를 누르려다 이내 제 손이 묶인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다. 연우는 그제야 제가 있는 곳이 어떤 공간 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어, 일어났네?"

이연옥이 뿌리다 만 휘발유를 마저 뿌리며 돌아다니던 김태강이 연우를 발견하곤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연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힘겹게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몰라?"

널 죽이려고 하고 있잖아. 김태강이 다시 휘발유를 뿌리며 돌아다녔다. 연우가 지끈 울리는 머리에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왜, 당신이 뭐라도 되는 것 같아서 그럽니까? 연우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내내 웃는 표정을 유지하던 김태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우가 그의 반응을 확인하고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그냥 사회 부적응자일 뿐인데, 뭘 그렇게까지 노력을 하지?"

"뭐?"

"지금 본인의 존재를 증명하겠다고 발악을 하는 중이잖습니까."

아닙니까? 연우가 비죽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김태강은 이제 얼굴을 한껏 구기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눈썹과 힘이 잔뜩 들어간 눈, 우악스럽게 비틀린 입이 그의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만들고 있었다. 연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나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어 준답니까?

이제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휘발유 통을 내던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 다가온 김태강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연우가 눈을 치켜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김태강이 으르렁대며 읊조렸다. 이봐, 곱게 자란 아가씨.

"착각하고 있나 본데,"

"..."

"세상이 날 영웅으로 만들어주든 아니든,"

넌 여기서 죽어. 김태강이 그녀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의 분노에 찬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심장을 찔러드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의 눈가 주변의 근육들은 긴장의 띠가 된 주름을 만들어냈다. 그의 시선은 날카롭게 빛났고, 눈에는 이미 재가 되어버린 듯한 열정이 물씬 피어났다. 그의 분노는 공기를 빠르게 달구었다. 연우가 그런 그에게 눈을 맞추며 태연히 물었다. 왜 나를 선택한 겁니까? 김태강이 말을 낚아채듯 대답했다. 그건 원래 그런 거야. 원래부터, 너 같은 년들은 태가 나. 태가. 그런데도 왜 굳이 너냐고, 그야,

"네가 제일 마음에 안 들어."

"..."

"네 그 상판대기부터, 실실 웃는 표정도, 목소리도, 그 송하영도.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가만히 김태강의 말을 들은 연우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런 이유라면 들어줄 필요도 없겠네.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김태강이 멱살을 쥔 손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손을 쓱 쳐다본 연우가 다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대꾸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당신은 그냥, 내가 약해 보여서, 그런데 부러워서 그런 거 아닌가?"

"뭐?"

"내가 여자라서, 당신보다 약해 보여서. 그런데도 내가 부러워서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웃기지도 않아, 정말. 연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태강의 주먹이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묵직한 고통이 그녀에게 가해졌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려던 찰나, 이어지는 김태강의 무분별한 주먹질에 연우는 몸에 힘을 쭉 빼고 주먹질을 받아 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태강이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왜. 당신이 생각해도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그럽니까?"

연우가 입 안에 고인 핏물을 퉤 뱉었다. 덕분에 웅얼거리던 발음이 나아졌다. 연우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아까 그랬잖습니까, 세상이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든 아니든, 나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고. 그런데, 당신. 다른 건 생각을 못했나 봅니다.

"내가 여기서 죽든 아니든,"

"..."

"당신은 세상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을 겁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거니까. 당신 같은 쓰레기가 사회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할 거니까. 연우가 말했다. 김태강은 이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의 씩씩대는 소리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짜악-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연우의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연우가 터진 입 안을 혀로 굴려보다 꿀꺽, 핏물을 삼키곤 덧붙였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아무것도. 당신은 날 죽이더라도, 여전히 날 죽이지 못한 채로 이곳에 머물게 될 거라고. 여기서 그쪽은, 조금도 나갈 수 없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거야.

저주같이 쏘아지는 말에 김태강이 하! 하고 웃었다. 경찰 아가씨, 그건 그 쪽이 선택하는 게 아니야. 지금 네가 무슨 꼴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너도 볼 수 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가씨, 지금 네까짓 게 나한테 그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 그런 만한 군번이 안 된다고. 이해해?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었나 봐, 경찰이면 조금 나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되어선 다른 시다바리보다도 못하는가 몰라.

아가씨, 그건 네가 경찰로서 날 만났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인 거야. 그런데 지금 봐? 너는 여기 이렇게 묶여 있고. 널 묶은 사람은 나잖아? 안 그래? 김태강이 이죽거렸다. 연우가 노려보며 받아쳤다. 명백한 조소 섞인 목소리였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죽을 때까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 할 거니까. 그게 그쪽과 나의 차이라는 겁니다. 연우가 도발하자 김태강의 미간이 좁아졌다. 연우는 그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김태강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살핀 연우가 입술을 짓이겼다.

김태강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길 바랄 것이다. 때문에 그를 건드리며 자극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녀의 목표였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연우가 하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하영을 믿었다. 하영이 자신을 찾아낼 것이라고도 믿었다. 그 믿음에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김태강이 연우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잡아 돌렸다. 그는 연우의 불쾌한 표정을 보고 보일 듯 말 듯 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큰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으며 서늘한 두 눈을 연우에게 똑바로 고정한 모양새가 퍽 기괴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으며 연우를 눈에 담은 김태강이 쏘아지듯 달려 나가 휘발유를 챙겨 건물을 빠져나갔다. 연우가 고함을 지르며 그를 세워보려 하였으나 김태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공간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졌다. 매캐한 냄새를 인지하기 전부터 미칠 듯한 열기가 연우를 감쌌다. 연우는 눈을 감고 한 가지 생각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하영은 어디까지 왔을까.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하영이 뒤늦게 도착한 뒤 마주치는 게 재가 되어버린 자신이 아니길 기도하며. 연우의 눈꺼풀에 힘이 점차 풀려갔다.

퐁-. 퐁-. 라이터의 청량한 소리가 여전히 머릿속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김태강은 눈을 감은 채로 조금 전 연우의 모습을 떠올리다 코앞까지 훅 끼쳐오는 열기에 마치 중요한 일을 방해받기라도 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불길이 폭발적으로 타오르며 어두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결핍으로 가득 찬 눈가에 서서히 황홀함이 일렁였다. 새카만 눈동자가 붉게, 노랗게 물들고 그 순수한 열정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정열이란! 그의 눈동자에 광열이 스며들었다.

이성은 함께 기화한 지 오래였다. 그는 그 장관에 넋을 잃고, 뜨거운 열기와 타오르는 화염이 전해주는 묘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불꽃이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몸은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고, 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그는 불가항력적으로 그 황홀한 순간에 반응했다. 불길이 더욱 격렬해질수록 그의 몸도 조급하게 그 흐름에 맞춰 고조되었고, 마침내 그는 혼자서 그 황홀한 감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불꽃이 절정에 이를 때, 그의 몸도 그에 맞춰 마지막 쾌감을 맞이하며 깊은 해방을 느꼈다.

그는 완전히 매료되었다.그의 몸은 스스로를 완전히 놓아버렸다.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이 서서히 그의 의식을 깨우기 시작했다.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미묘한 감각이 점차 뚜렷해졌고, 그는 천천히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몸의 반응을 인식했다. 소변이 천천히 바닥으로 흘러내려 퍼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온몸이 이완된 상태에서, 그는 바닥으로 흐르는 따뜻한 액체가 다리를 타고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 순간의 여운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단언컨대, 그의 삶에서 가장 완벽하고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넋이 나간 상태에서의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다. 붉은 화염이 그의 하반신을 감쌌다. 순식간에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황홀감의 잔여물은 여전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고통에서의 몸부림도 있을 터였다. 어째서인지 타오르는 감각에도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옷에 불이 옮겨붙고, 제 신체 말단이 타들어 가는 감각이 조여오는 상황에도 그는 우두커니 서 소리만 질러댈 뿐이었다.

너무 고양되어서일까, 고통스러워서일까, 혹은 다른 이유일까.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었다. 김태강은 이제는 제 귀에서 고함소리가 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대었는지 귀는 반쯤 기능을 잃은 듯했다. 무릎께까지 까맣게 타오르는 제 몸을 그는 슬쩍 내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인제야 끝없는 공포가 밀려들어 왔다.

아주 극적인 순간이었다.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들리지 않았던 사이렌 소리가 이제는 눈으로 보였다. 붉은색과 푸른색 빛이 번쩍거리는 경광등이 눈앞을 시끄럽게 했다. 모든 장면이 무성 영화의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전에 봤던 형사가 제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김태강이 얼굴을 구겼다. 이런 씨발 진짜. 이런 결말이 다 있나.

김태강은 억울했다. 내가 왜?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사실 바보 같은 자신 때문인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방화는 그저 그 여자를 죽이기 위한 수단이었어야 했다. 멍청하게도 그것에 매료된 것은 온전히 제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한순간의, 찰나 중의 찰나에. 하지만 김태강은 그것을 죽어도 인정할 수 없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이미 죽어있을 저 안의 계집 때문이어야 했다.

수갑을 한손에 들고 그에게 달려오는 형사를 뒤로하고, 타오르는 건물 안으로 달려들어 가는 인영이 흐릿하게 보였다. 김태강은 온몸을 비틀었다. 열에 의한 단백질 변형일지도 몰랐다. 송하영이겠지? 그런데 어쩌나. 살아는 있으려나? 안타깝게 됐네. 아주 안타까운 일이지.

김태강은 송하영을 비웃었다. 동시에 그는 불행해졌다. 그 여자를 죽이려고 했던 동기와 같은 이유였다. 그는 그저 몸에 힘을 풀었다. 털썩, 화염 속으로 그의 상반신마저 빨려 들어갔다. 김태강은 강한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타오르는 소리가 더 가까이 귓가에 가득했다.

***

연우는 꽤 오래 일어나지 못했다. 하영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연우가 누워 있는 몇 주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하영이 손수건에 물을 적셔 연우의 얼굴을 닦아 주며 생각에 잠겼다.

김태강은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결국 사망했다. 그의 조력자는 체포되어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사건은 피의자 사망으로 인해 종결되었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영수는 유가족들의 모임에 종종 참여해 위로를 전했다.

그리고 하영은 불길 속에서 연우를 빼내 왔다. 사방에 열기가 가득한 곳에서 제 연인을 발견했을 때의 절망감이란. 하영에게는 그 불구덩이가 절대 가고 싶지 않은 지옥이자 들어가야만 하는 의무였다. 그것은 연우 뿐만 아니라 하영 자신에게도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연우가 김태강을 자극한 덕에 그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의 계획대로였다면 그는 연우에게도 기름을 부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변에도 기름을 붓다 말고 연우와 설전을 벌이며 조금씩 엇나간 것이겠지. 적어도 이연옥에게 듣기로는 그랬다.

하영의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의미가 없는 후회임을 알지만서도, 제가 더 빨리 알아챘다면. 제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도착했다면.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영은 매일 밤을 연우의 옆에 앉아 억눌린 기도로 지새웠다.

절규에 가까운 기도였다. 매일 밤 하영은 신에 고해했다. 감긴 연우의 두 눈꺼풀이 감춘 눈동자가 그리워 삼킨 절규의 화살은 전부 제게로 향했다.

연우의 몸에 남은 자국들은 옅어질 듯하면서도 가시질 않았다. 하영이 죄책감에 더욱이 괴로워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하영아. 어머니께서 가져다 달라고 하시더라."

"네. 늘 감사해요."

"니... 그래도 집에는 좀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맞아요. 그러다 옆에 같이 누우시겠어요."

우주의 말에 영수가 우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우주가 제 옆구리를 만지작대며 하영에게 말을 붙였다. 이러다 몸 상하시겠어요. 댁으로 가셔서 푹 쉬고 오세요 여기 저희가 있으니까... 우주의 말끝이 흐려졌다. 영수가 우주의 말을 장난스레 받아내었다. 그래 하영아. 온 우주의 소원인데 좀 들어줘라.

하영이 연우의 머리칼을 손등으로 쓸었다. 알겠지, 하영아? 어머니 걱정하신다. 영수의 말이 하영에게는 그대로 전해지질 않을 듯했다. 하영이 숨을 내쉬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일 즈음에요. 오늘은 연우랑 있을게요. 하영이 연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영수와 우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게는 연우 뿐만 아니라 하영도 위태로운 사람이었다. 우주가 무슨 말을 더 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작게 제지하는 영수의 손길에 입을 다물었다.

한바탕 하영을 휩쓸던 우주와 영수가 떠난 후, 병실에는 한동안의 적막이 흘렀다. 하영은 연우에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제 손을 마주 잡아주지 못하는 연우를 다시금 깨닫고 싶지 않았다.

하영은 구석에 접어둔 제 겉옷을 뒤적였다. 이내 작은 벨벳 케이스가 손에 잡혔다. 며칠 전 연우의 집에 들러 이것저것 챙겨선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에 띄어 사 온 반지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연출이 있지 않은가. 진실한 사랑이 담긴 키스 이후엔 깊은 잠이 들었던 공주가 깨어난다던가, 눈물 한 방울이 닿은 순간 판도가 뒤집힌다던가, 하는. 하영은 그런 동화 속 이야기에라도 기대어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곳이 동화 속 세상이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하영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동화 속 세상이라기에는 제가 봐온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그 발자취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요컨대, 그 하나하나의 불행은 결코 동화 속 "역경"이어서는 안 되었다.

하영은 그렇게 동화 속 이야기에도 기댈 수 없었다. 그의 삶 속에서 동화같이 아름다운 것을 꼽자면 몇 없는 것들 중에서도 제일인 것에도.

반짝이는 반지를 손안에서 몇 번 굴렸다. 굴절된 빛이 반짝였다. 모조리 죽은 색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진 빛인 것만 같았다. 하영이 물끄러미 손안의 반지를 내려다보다 연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손아귀의 작은 것보다 훨씬 빛나는 그의 연인이 여전히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하영은 간병인 침대를 끌어다 걸터앉았다. 조심스레 잡은 연우의 손은 하영의 손을 맞잡지 못했다. 하영은 손가락 사이에 반지를 밀어 넣으며 작게 떨었다. 동화 같은 일을 바라지는 못했지만, 하영에게는 조금 남은 기도였다.연우야, 제발.

꾹꾹 눌러 담은 기도가 연우의 피부 위에서 부드럽게 반짝였다. 잘 어울리네. 하영이 애써 작게 미소 지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하루가 다르게 간절했다. 하영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로 손에 얼굴을 묻는 것 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새벽녘이었다. 여전히 꽉 잡은 연우의 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영이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갑작스레 쏟아진 빛에 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벽 네 시 오 분 전. 한참 흐른 시간에 하영이 잠시 정지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몇 시간 남지 않은 아침 회진 시간을 상기하며 연우의 손을 포개어 잡고 침대 끝자락에 엎드렸다.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이 밝았다. 기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새벽일 듯했다. 하영이 잠시 몽상에 잠겼다 눈을 감았다. 포개어 잡은 연우의 손에 끼워진 반지의 차가운 감촉이 하영의 손가락 끝에 전해져 왔다.

하영이 다시금 잠에 드려던 순간.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깜빡였다. 꿈인가. 비몽사몽 한 정신이 눈앞을 흐렸다.

어? 번뜩이는 정신에 하영이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여전히 제 머리칼을 만지작대는 손길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한쪽 손을 세세 말아쥐며 하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 안쪽 살이 눌리며 손에 핏기가 가셨다. 억겁같이 느껴지는 한순간이었다.

하영의 눈에 연우가 가득 들어왔다. 저를 보며 안쓰러운 미소를 짓는. 하영이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연우, 연우야. 연우야.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기분은 가신 지 오래였지만 지독하게도 꿈에 그려왔던 순간을 마주하자 하영은 그 무엇도 분간할 수 없었다.

하영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개었던 연우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힘없는 손이 하영의 손을 마주잡아왔다. 연우의 얼굴을 눈에 담으려 깜빡이지도 않는 눈이 자꾸만 흐려졌다. 연우의 얼굴이 다시 또렷하게 보인 순간에는 축축하게 젖은 제 뺨이 느껴질 뿐이었다.말하고 싶었던 게 얼마나 많았던가. 듣고 싶었던 게 얼마나 많았던가.

연우가 제 손을 뻗어 덜덜 떨리는 하영의 손을 덮었다. 입꼬리를 끌어당겨 겨우 웃으며 연우가 마른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올 리 없었지만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선배."

하영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연우가 그런 하영을 보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어지는 연우의 말을 기다리며 온 신경을 집중한 하영의 떨리는 숨결이 온전히 전해져 왔다. 연우가 쇳소리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가... 집에 가서 자라고 했죠."

농담 서린 한 마디에 하영이 웃었다. 입 안으로 들어온 눈물이 짜게 느껴졌다. 연우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하영의 눈물을 닦아내었다. 울지 마. 왜 울어. 나 괜찮아요. 연우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마주 잡은 두 손이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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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Horacio Brakus 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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